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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서울역사를 숭례문역(崇禮門驛) 터로 명칭변경 재지정해야
등록일: 2015-11-26 18:05:48 , 등록자: 김민수 옛 서울역사를 숭례문역(崇禮門驛) 터로 명칭변경 재지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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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국주의 통감통치 2년인 1907년 10월 20일 대리청정하는 황태자 이척이 숭례문(崇禮門) 정거장(停車場)에 나아가 일본국 황태자가 귀국할 때 작별 인사를 하였다. 기거를 타고 인천항(仁川港)에 가서 작별 인사를 하였다. 1909년 1월 7일 경운궁(慶運宮)에 나아가 고조 광무제에게 문안하고 이어서 숭례문 정거장에 가서 기거를 타고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를 따라 남부지역으로 떠났다. 1월 13일 대전역(大田驛)을 출발하여 숭례문역(崇禮門驛)에 도착하였다. 이어 경운궁(慶運宮)에 나아가 고조 광무제에게 문안한 뒤 제정 대한국 황태자궁인 창덕궁으로 환궁(還宮)하였다.
1917년 5월 9일 대리청정하는 황태자 이척이 숭례문역(崇禮門驛)에 가서 증기거를 타고 함흥(咸興)으로 떠났다. 의친왕 이강(李堈) 이하 종척(宗戚)과 귀족(貴族)들이 배종하였는데 원산역(元山驛)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1919년 9월 2일 일본군국주의 총독부 신임 총독(總督) 사이토 마코토, 정무 총감(政務 總監) 미즈노 렌타로가 숭례문역(崇禮門驛)에 도착하였을 때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노인단(新韓村 老人團) 강우규(姜宇奎)가 폭탄을 투하하였다.신문기자·수행원·일본경찰 등 37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숭례문역(崇禮門驛) 터 경계부터 10미터 떨어진 지점 지표면에서 바라본 앙각 27도 아래로 건축 제한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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