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高麗國:918-1393) 35대 국왕 이성계(李成桂)
등록일: 2014-02-02 08:40:36 , 등록자: 김민수 고려국(高麗國:918-1393) 35대 국왕 이성계(李成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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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7월 12일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대비(王大妃)에게 아뢰기를 “지금 고려국(高麗國) 34대 국왕 공양왕(恭讓王:1389-1392)이 혼암(昏暗)하여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 사직(社稷)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으니 이를 폐하기를 청합니다.”하였다. 마침내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하기로 일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남은(南誾)이 드디어 문하 평리(門下 評理) 정희계(鄭熙啓)와 함께 교지를 선포하니, 공양왕이 부복(俯伏)하고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다. 내가 성품이 불민(不敏)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는가?”하면서, 이내 울어 눈물이 두서너 줄기 흘러내리었다. 마침내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原州)로 가니, 백관(百官)이 전국새(傳國璽)를 받들어 왕대비전(王大妃殿)에 두고 모든 정무(政務)를 나아가 품명(稟命)하여 재결(裁決)하였다. 7월 13일(임진)에 대비(大妃)가 교지를 선포하여 이성계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다. 7월 16일(을미)에 배극렴 등이 문을 밀치고 바로 내정(內庭)으로 들어와서 국새(國璽)를 청사(廳事) 위에 놓으니, 이성계가 두려워하여 거조(擧措)를 잃었다. 이천우(李天祐)를 붙잡고 겨우 침문(寢門) 밖으로 나오니 백관(百官)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萬歲)를 불렀다.
1392년 7월 17일 고려국(高麗國:918-1393) 35대 국왕 이성계(李成桂)가 수창궁(壽昌宮)에서 고려국(918-1393) 35대 왕위에 올랐다. 7월 28일 고려국(高麗國:918-1393) 35대 국왕 이성계(李成桂)가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大小 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군민(軍民)들에게 교지를 내리기를 “왕은 이르노라.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낳아서 군장(君長)을 세워, 이를 길러 서로 살게 하고, 이를 다스려 서로 편안하게 한다. 그러므로, 군도(君道)가 득실(得失)이 있게 되어, 인심(人心)이 복종과 배반함이 있게 되고, 천명(天命)의 떠나가고 머물러 있음이 매였으니, 이 것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나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이 책임을 능히 짊어질 수 없을까 두려워하여 사양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백성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하늘의 뜻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요청도 거절할 수가 없으며, 하늘의 뜻도 거스릴 수가 없습니다.’ 하면서, 이를 고집하기를 더욱 굳게 하므로, 나는 여러 사람의 심정에 굽혀 따라 마지못하여 왕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 국호(國號)는 그대로 고려(高麗)라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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