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德壽宮)은 상왕(上王)의 호(號), 상왕전(上王殿)의 전호(殿號)
등록일: 2013-09-08 12:38:33 , 등록자: 김민수 
덕수궁(德壽宮)은 상왕(上王)의 호(號), 상왕전(上王殿)의 전호(殿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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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 6월 1일 정종이 태상궁(太上宮)의 호(號)를 세워 상왕(上王)의 호(號)인 덕수궁(德壽宮) 전하라 하고, 부(府)를 승녕부(承寧府)라 하였다. 7월 2일 정종이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상왕(上王)의 호(號)인 덕수궁(德壽宮) 전하에 조알하고,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태상왕(太上王)의 호(號)인 덕수궁(德壽宮) 전하의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계운 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이라 하였다. 1767년 12월 12일 춘추관의 당상과 낭관에게 1407(태종 7)년인 정해년 실록(實錄)을 찾아 오라고 명하였는데 기사관(記事官) 류강(柳焵)이 실록을 읽어 아뢰었는데, 상왕이 승하시까지 한시적으로 임어한 상왕전(上王殿)의 전호(殿號)인 덕수궁(德壽宮)의 대목에 이르자, 영조가 말하기를, “상왕전(上王殿) 덕수궁이 어느 곳에 있는가?”하니, 류강이 말하기를, “상고해 볼 만한 문헌이 없습니다.”하였다. 1768년 5월 22일 영조가 하교하기를, “상왕이 승하시까지 한시적으로 임어한 상왕전(上王殿)의 전호(殿號)인 덕수궁(德壽宮)은 지금의 시민당(時敏堂)이고 연희방(燕喜坊)은 지금의 흥덕동(興德洞)이다.”하였다.
1907년 8월 6일 장례원 경(掌禮院 卿) 신기선(申箕善)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제왕의 가법(家法)에는 의(義)를 은혜보다 중하게 여기므로 비록 부자간의 친한 사이에도 임금과 신하의 분의가 있다고 합니다. 임금 자리를 물려받은 제왕이 상황(上皇) 앞에서 반드시 ‘신(臣)’이라고 부릅니다. 역대의 고사(故事)를 명백하게 상고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 500년간에도 시종 준행하고 혹시라도 고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유년(1897) 이후로 이 규례를 갑자기 변경하여 태묘(太廟)의 축문(祝文)에도 ‘신(臣)’을 일컫지 않으며, 창덕궁 황태자(皇太子) 전하가 조선국 왕세자로 있으면서 상소할 때도 ‘소자(小子)’라고 쓰고 ‘신(臣)’을 일컫지 않았습니다. 은혜로 의리를 가려 임금과 신하의 분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태묘의 축문에도 옛 규례를 준행하여 ‘신(臣)’ 자를 쓰고 창덕궁 황태자 전하께서도 또한 광무제 폐하 앞에서 반드시 ‘신(臣)’이라고 일컬을 것이며, 이번 고조 광무제인 덕수궁(德壽宮:경운궁 연지(蓮池) 북쪽의 서양식 상황전(上皇殿)의 명칭) 폐하께 공손히 올리는 책문(冊文) 가운데서도 전례대로 ‘신(臣)’ 자를 쓰소서.”하였다.
1907년 11월 14일 창덕궁 황태자(皇太子) 전하가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광무제 폐하의 상황(上皇)이 임어(臨御)하는 상황전(上皇殿)의 전호(殿號)인 덕수궁(德壽宮)을 안국동(安國洞)에 영건(營建)하라.”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일본 국왕, 총독이 대한제국(大韓帝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를 덕수궁(경운궁 연지(蓮池) 북쪽의 서양식 상황전(上皇殿)의 명칭) 이태왕, 황태자궁인 창덕궁 황태자(皇太子)를 창덕궁 이왕이라 하였다.1913년 3월 4일 창덕궁 황태자가 영국인(英國人) 데이비슨에게 주대정식 은제 향로(周大鼎式 銀製 香爐) 1개(箇)와 금(金) 500원(圓)을 증여하였는데 이는 경운궁 연지(蓮池) 북쪽의 서양식 상황전(上皇殿)인 덕수궁(德壽宮) 건축의 감독으로 다년간 경영했으므로 기념품을 내린 것이다.1922년 4월 26일 영친왕이 동경에서 돌아와 경운궁 연지(蓮池) 북쪽의 서양식 상황전(上皇殿) 덕수궁(德壽宮)에 입차(入次)하였다. 5월 11일 마사코의 아들 이진(李晉)이 경운궁 연지(蓮池) 북쪽의 서양식 상황전(上皇殿) 덕수궁(德壽宮)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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