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 1922년 순종 융희제 순정황후
등록일: 2013-08-16 14:09:26 , 등록자: 김민수 
1919년 - 1922년 순종 융희제 순정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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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월 21일 묘시(卯時)에 광무제 폐하가 함녕전(咸寧殿)에서 붕어하였다. 다음날 복(復)을 행하였다.1월 22일 옷을 갈아입었다. 순종 융희제와 의친왕 이강(李堈)은 상복(上服)을 벗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소복(素服)을 입고 상임(上袵)을 하였다. 순정황후와 의친왕비 이하는 모두 관(冠)과 상복(上服)을 벗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소복을 입었다. 빈전(殯殿)과 혼전(魂殿)을 함녕전(咸寧殿)으로 하도록 명하였다. 총호원(摠護員)으로 민영규(閔泳圭)를 삼으라고 명하였다. 빈전주감(殯殿主監) 도감(都監)을 개칭한 말이다. 제조(提調)에 이재극(李載克), 조동윤(趙東潤), 전 특진관(特進官) 민영찬(閔泳瓚)을 어장주감 제조(御葬主監 提調)에 민영휘(閔泳徽), 이완용(李完用), 이재곤(李載崐)을, 산릉주감 제조(山陵主監 提調)에 김종한(金宗漢), 전 판서(判書) 민영달(閔泳達), 김춘희(金春熙)를 차하(差下)하였다.1월 24일 미시(未時)에 목욕(沐浴)과 습(襲)을 행하고, 의례(儀禮)에 맞게 전(奠)을 설치하였다. 신시(申時)에 소렴(小斂)을 하고 의례(儀禮)에 맞게 전(奠)을 설치하였다.
1월 26일 전교하기를, “홍릉(洪陵)을 천봉하는 문제는 앞서 광무제 폐하가 여러 해 동안 마음을 쓰셨으나 겨를이 없었던 유지(遺志)이다. 내가 어찌 감히 우러러 본받지 않겠는가? 인산(因山)이 이미 금곡(金谷)으로 정해졌으니 천봉하는 날짜도 인산일 전에 택입(擇入)토록 하라. 그리고 제반 의식 절차는 어장주감(御葬主監)과 산릉주감(山陵主監)이 겸하여 관리하여 거행하도록 하라.”하였다. 이어서 전교하기를, “천봉(遷奉)할 곳의 봉표(封標)는 내일 다시 간심한 후 봉표할 때 같이 거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허우(虛右)의 제도는 공경하게 명릉(明陵)의 예에 따라 하도록 하라.”하였다.미시(未時)에 대렴(大斂)을 하였다. 하재궁(下梓宮)을 행하고 의례(儀禮)에 맞게 전(奠)을 설치하였다. 총호원(總護員)에서, ‘관의 은못 위에 덧칠하는 일을 이달 27일에 시작하며 10번을 하루 걸러 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금번에는 매일하라. 그리고 산릉주감 제조 민영달(閔泳達)이 지관 상지원(相地員) 등을 데리고 금곡(金谷)에 달려가 산을 봉심하고 별단(別單)으로 서입(書入)토록 하라.”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금곡을 다시 봉심한 후에 그대로 봉표(封標)하라.”하였다. 총호원(總護員)이, ‘금곡(金谷)을 다시 간심(看審)한 후 이어 봉표(封標)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월 27일 미시(未時)에 성복(成服)을 하였다. 총호원(總護員)이 의논하여 인산(因山)할 날을 택하여 별단(別單)을 올렸다.“홍릉(洪陵)의 왼쪽은 큰 산줄기가 둘러싸여 손방(巽方)과 진방(辰方)으로 떨어지고 을방과 진방으로 뻗어나갔으며, 묘(卯)방과 을(乙)방으로 떨어져 바뀌다가 갑술방(甲戌方)으로 우뚝 일어서고 묘방(卯方)에서 머리를 들어 축간방(丑艮)으로 솟았고 을방(乙方)을 등지고 신방(辛方)을 바라보는 좌향(坐向)이며, 간병방(艮丙方)에서 신방(辛方)을 얻어 건방(乾方)으로 합하여 경방(庚方)으로 나가 곤방(坤方)으로 돌아갔습니다.역사(役事)를 시작할 때, 풀을 베고 흙을 파는 일은 1월 30일 오후 4시에 하고, 후토신(后土神)에 지내는 제사 곧 산신제(山神祭)는 같은 날에 하며, 먼저 옹가(甕家)를 짓습니다. 2월 6일 오전 6시에 금정(金井)을 열며, 같은 달 12일 오전 10시에 구덩이 깊이를 8척 3촌으로 파는데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합니다. 외재궁(外梓宮)을 배진(陪進)하는 시간은 같은 달 16일 오전 8시이고, 흙은 병임(丙壬) 방향에 모아둡니다. 외재궁을 내리는 시간은 같은 달 17일 오후 4시이고, 찬궁(欑宮)을 여는 시간은 3월 2일 오전 6시입니다. 발인(發靷)은 같은 달 3일에 하며 상여(喪輿)를 멈추되 꺼리는 방위는 곤방(坤方)입니다. 빈소를 만들고 대여(大轝)가 침전(寢殿)에 도착한 후, 일시(日時)에 따라 찬궁(欑宮)을 열고, 일시에 따라 현궁(玄宮)을 내리는 시간은 같은 달 4일 오후 4시 입니다.”하였다.
1월 27일 홍릉(洪陵)을 천봉하는 날짜를 정하는 별단(別單)을 올렸다. 구능(舊陵)을 파헤치는 시간은 1월 30일 오후 4시인데, 후토신에게 고유제(告由祭)를 같은 날 먼저 지냅니다. 옹가(甕家)를 만드는 것은 일시(日時)에 따르며, 현궁을 꺼내는 시간은 2월 12일 오전 6시이며, 침전(寢殿)에 빈소(殯所)를 차리는 것도 일시에 따릅니다. 찬궁(欑宮)을 여는 것은 일시에 따르며, 발인(發靷)해 나가는 것도 일시에 따릅니다. 산릉(山陵)에 도착한 후 빈전(殯殿)을 차리고, 빈전(殯殿)에 모시는 것은 일시에 따르며, 찬궁(欑宮)을 여는 시간은 2월 16일 오전 8시 30분입니다. 현궁을 내리는 시간은 같은 날 오후 2시입니다. 2월 5일 총호원(總護員)이, ‘재궁에 칠을 한 포(布) 위에 덧칠하는 일을 각 년의 예에 의하여 10번씩 이틀에 한 번 진행하려 합니다.’라고 아뢰니, 답하기를, “이번에는 날마다 하도록 하라.”하였다.2월 8일 장의 제관 부장(葬儀 祭官 副長) 윤덕영(尹德榮)을 면직시키고 조동윤(趙東潤)을 임명하였다. 상민(商民) 사일환(史一煥) 등이 봉도회(奉悼會)와 봉도단(奉悼團)을 만들어 인산(因山) 때에 대소 상여(喪輿)의 담배군(擔陪軍)과 인군(引軍) 등 각 항에 필요한 군정(軍丁)을 자원하여 거행하기로 하였다.2월 9일 빈전(殯殿)에 나아가 국장(國葬)의 봉고식(奉告式)을 행하였다. 이어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2월 12일 홍릉(洪陵)에서 현궁(玄宮)을 꺼냈다. 김관호(金觀鎬)를 보내어 봉심(奉審)하도록 명하였다.
2월 13일 홍릉(洪陵)의 빈전(殯殿)에 친히 진향(進香)하는 것은 민영휘(閔泳徽)를 보내어 섭행(攝行)토록 하였다. 친히 지은 제문(祭文)에, “인자한 모습이 떠나보낸 지 이에 2기(紀)가 되었는데, 휘음(徽音)은 어제와 같도다. 유쾌한 얼굴빛은 어느 때였든가? 시와 노래로 자식을 보살펴 기르셨도다. 하늘과 땅은 끝이 없는데 동성(東城)은 밀접하고 가까웠도다. 능(陵)의 잣나무는 이미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데 근심을 품고 걱정하니, 훌륭하신 아버님에 의지할 뿐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셔 거듭 재앙이 내리니, 황황(皇皇)한 슬픔은 마음을 아프게 하고 뼈를 사무치는도다. 빠른 세월은 순식간에 흘러 장차 발인(發靷)하려 하는데 금곡(金谷)에 아버님이 생전에 정하신 무덤자리는 그 점괘가 길조로다. 어찌 부우산(鮒隅山)에서 점을 치고 어찌 상설(象設)로 옮겨 오묘한 조화를 다시 보겠는가? 옥음(玉音)을 받들자니 정신이 혼미하여 슬픔에 의지하였다. 찬궁(欑宮)과 장막(帳幕)은 고요하기만 한데 보이는 곳마다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도다. 슬픔에 빠져 어찌 맡은 일을 감당하겠는가? 영세토록 편안하게 받들고자 하니 우뚝 선 저 오잠(烏岑)에 감히 향을 마련하여 비오니 높으신 영혼은 흠향하소서.”하였다.
2월 15일 강필우(康弼祐)에게 홍릉(洪陵)에 나아가 봉심하고 오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찬시(贊侍) 윤형구(尹逈求)에게 홍릉을 천봉할 때 큰 상여를 배종하도록 명하였다.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영여(靈轝)가 금곡(金谷)의 산릉을 향해 떠나는데, 능호(陵號)를 홍릉(洪陵)이라 하였는데, 옛날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다.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2월 16일 홍릉(洪陵)을 천봉(遷奉)하여 현궁(玄宮)을 내리고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애책문(哀冊文)과 지석(誌石)은 옛 것에 22년 기미년(1919) 정월 16일 양주군(陽州郡) 미금면(渼金面) 금곡리(金谷里) 을좌(乙佐)에 옮겨 모셨다는 것을 더 새긴 후 그대로 사용하도록 명하였다. 능을 옮기고 능소(陵所)에서 우제(虞祭)를 지내고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2월 27일 빈전(殯殿)에 나아가 시호 책보(諡號 冊寶)를 올리고 이어 개명정 별전(改銘旌 別奠)을 행하였다.
3월 1일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전(朝奠)과 조상식(朝上食),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 석전(夕奠)을 행하였다.3월 2일 빈전(殯殿)에 나아가 찬궁(欑宮)을 열었다. 이어서 조전(朝奠)과 조상식(朝上食), 주다례 겸 계빈전(晝茶禮 啓殯奠), 조전(祖奠), 석상식(夕上食), 석전(夕奠)을 행하였다.3월 3일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전(朝奠)과 조상식(朝上食)을 행하였다. 진시(辰時)에 영여(靈轝)가 출발하여 훈련원(訓練院)에 이르러 국장식(國葬式)을 행하였다. 이어 금곡(金谷)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대가(大駕)가 영여(靈轝)를 따라갔다. 해시(亥時)에 영여(靈轝)가 금곡(金谷)의 빈소(殯所)에 도착하였다. 성빈전(成殯奠)을 행하였다. 3월 4일 빈소에서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해시(亥時)에 현궁(玄宮)을 내리고 이어 입주전(立主奠), 초우제(初虞祭)를 행하였다. 3월 5일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 겸 안신제(安神祭)를 행하였다. 3월 12일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다섯 번째 우제(虞祭)와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6월 13일 민영휘(閔泳徽)와 이재극(李載克), 김종한(金宗漢), 김춘희(金春熙)를 국장의궤(國葬儀軌)의 편찬 고문에 임용하였다. 6월 26일 일왕이 일본군국주의 전범추앙관인 야스쿠니신사에 공물료 봉납을 요구하여 주었다. 야마가타 이사부로가 국장의식(國葬儀式)의 사진첩 1부를 진헌(進獻)하였다.
1920년 2월 7일 돈화문(敦化門) 안에 나아가 연주(練主)를 조성하였다. 효덕전(孝德殿) 안으로 들여올 때 지영(祗迎)하였다.2월 9일 효덕전(孝德殿)에 나가 연제(練祭)를 행하였다. 그리고 대한문(大漢門)에 나가 우주(虞主)를 지송(祗送)하였다. 또 효덕전(孝德殿)에 나가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3월 12일 효덕전(孝德殿)에 나가 주다례를 지내고, 겸하여 동가제(動駕祭)를 고하였다. 그리고 연주(練主)를 받들어 모셔 창덕궁(昌德宮)의 선정전(宣政殿)으로 옮겨 안치하고, 석상식(夕上食)을 올리고 겸하여 봉안제(奉安祭)를 행하였다.4월 7일 홍릉(洪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전사(典祀) 한상학(韓相鶴)에게 건원릉(建元陵), 현릉(顯陵), 목릉(穆陵), 휘릉(徽陵), 숭릉(崇陵), 혜릉(惠陵), 원릉(元陵), 수릉(綏陵), 경릉(景陵)을, 이성묵(李聖默)은 의릉(懿陵)에 나가 봉심(奉審)하고 오도록 명하였다. 4월 15일 홍릉(洪陵) 부근의 금곡(金谷) 백성들에게 일금 50원을 특별히 하사하였다. 능(陵) 주위 소나무의 벌레를 없애느라고 수고했기 때문이다. 6월 20일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단오제(端午祭)를 행하였다. 이어 주다례(晝茶禮) 겸 별다례(別茶禮),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7월 30일 윤형구(尹逈求)에게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어진(御眞)을 봉심(奉審)하고 오도록 명하였다.8월 20일 김영갑(金永甲)에게 명하여 홍릉(洪陵)에 나아가 칠석(七夕)날의 별다례(別茶禮)를 감제(監祭)하고 오도록 하였다.
9월 26일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망제(望祭) 겸 추석제(秋夕祭)를 지내고 고유제(告由祭)의 제주(題主)를 바꾸었다. 이어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김관호(金觀鎬)에게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어진(御眞)을 봉심(奉審)하고 오라고 명하였다. 효덕전(孝德殿) 상 책보관(上 冊寶官)에 박영효(朴泳孝)를, 제주 서사관(題主 書寫官)에 이지용(李址鎔)을 차출(差出)하였다.9월 27일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존호 책보(尊號 冊寶)를 올린 후 제주(題主)를 바꾸었다. 이어 별대제(別大祭)와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9월 30일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홍릉(洪陵) 기신제(忌辰祭)의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기신(忌辰)이다. 김관호(金觀鎬)에 명하여 홍릉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감제(監祭)한 뒤 이어 건원릉(建元陵), 현릉(顯陵), 목릉(穆陵), 휘릉(徽陵), 숭릉(崇陵), 혜릉(惠陵), 원릉(元陵), 수릉(綏陵), 경릉(景陵)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오라고 하였다.10월 29일 대조전(大造殿)을 중건(重建)하는 공역(工役)이 준공(竣工)되었다. 낙성식(落成式)을 희정당(熙政堂)에서 행하였다. 1917년 겨울 대조전(大造殿), 희정당(熙政堂)에 화재가 있었는데 3년 공역으로 비로소 준공되었다.
1921년 1월 10일 이재극(李載克)이, ‘효덕전(孝德殿) 담제(禫祭)를 치른 후 효덕전, 경효전(景孝殿)을 부태묘(祔太廟)할 때 주감(主監)을 설국하는 일자(日子)를 우선 품정(稟定)해야 하므로, 삼가 각 년의 등록(謄錄)을 살펴보니, 전기(前期) 사삭(四朔)에 설행(設行)한 예(例)가 많이 있었는데, 정조조(正祖朝) 무술년(1778) 및 철종조(哲宗朝) 신해년(1851)에는 특교(特敎)로 상제(祥祭)를 지낸 후 설국(設局)하였고, 순조조(純祖朝) 임술년(1802) 및 헌종조(憲宗朝) 정유년(1837)에는 대신들에게 문의한 후 모두 상제(祥祭) 전에 설국했습니다. 금번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아뢰니, 명하기를, “상제(祥祭) 후 설국하라.”하였다. 2월 15일 이재극(李載克)이 아뢰기를, “효덕전(孝德殿) 경효전(景孝殿)을 부태묘(祔太廟)하기 위한 주감(主監)을 상제(祥祭)를 지낸 후 설국(設局)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주감 당상 낭청(主監 堂上 郞廳)을 즉시 차출하여 주감을 설국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추상(追上) 휘호(徽號)를 의정(議定)할 길일(吉日)을 일관(日官)에게 추택(推擇)하라고 하니, 2월 16일이 길하다고 합니다. 효덕전(孝德殿)을 부묘할 때는 마땅히 배향(配享)하는 신하가 있어야 하므로, 등록(謄錄)을 잘 살펴보니 모두 존호(尊號)를 의정하는 날 초계(抄啓)하였습니다. 지금 역시 전례에 의거하여 존호를 의정하는 날 친척이 함께 참여하여 회의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2월 18일 부묘주감(祔廟主監)에서 계청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 휘호 옥책문 제술관(徽號 玉冊文 製述官) 이재완(李載完), 서사관(書寫官) 김춘희(金春熙), 옥보 전문 서사관(玉寶 篆文 書寫官) 민영휘(閔泳徽), 개제주관(改題主官) 조동윤(趙東潤)을 차출하였다.2월 23일 부묘주감 제조(祔廟主監 提調) 조민희(趙民熙), 고문(顧問) 이재완(李載完)·민영달(閔泳達)이 임명을 받았다.3월 3일 민영휘(閔泳徽)가 경효전(景孝殿) 상휘호 책보관(上徽號 冊寶官)에 임용되었다. 3월 9일 경효전(景孝殿)에 휘호(徽號)와 책보(冊寶)를 섭상(攝上)하였다. 옥책문(玉冊文)에, “장찬(璋瓚)을 받들어 흠향하시도록 올리니 인자한 얼굴을 다시 우러르는 것같고, 완염(琬琰)에 새겨 호(號)를 바치니 본래부터 있던 국가의 예를 그대로 따를 뿐입니다. 다만 두려움만 더할 따름이니 어찌 선양했다고 하겠습니까? 삼가 우리 효자 원성(孝慈元聖) 정화 합천(正化合天) 홍공 성덕(洪功誠德) 명성황후(明成皇后)께서 성인(聖人)과 배체(配體)하여 모의(母儀)로 나라의 종주(宗主)를 세우셨는데 선경(善慶)으로 집안이 길하여 원경왕후(元敬王后)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명문(名門)에서 낳아 기르시니 정숙(貞淑)하고 생각이 깊고 성실하여 세칭(世稱) 지임씨(摯任氏), 태사씨(太姒氏)의 영덕(令德)이라 하였습니다. 육궁(六宮)의 가송(歌頌)이 널리 두루 미치니 다시 관저(關雎)의 훌륭한 덕이 내리는 것같은 인자함을 다시 보게 되었고, 구족(九族)의 은택이 널리 고루 미쳤습니다. 탁룡(濯龍)의 경계를 받들어 높이니 한두 번 극히 어려운 때를 만나 묵운(默運)과 음공(陰功)으로 30년간 내조(內助)하는 통치를 행하고 신명(新命)을 받았습니다.
아! 양세(羊歲)의 처참한 화(禍)로 황후(皇后)의 요적(褕翟)의 빛이 갑자기 사라지고 동관(彤管)의 아름다움이 잘못 전해져 하민(下民)은 녹(祿)이 사라지고 풀 한포기 생명조차 보상받지 못하니 소자(小子)가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거듭 이같은 국흉(鞠凶)에 통분하는 마음뿐입니다. 아, 어찌 전례(典禮)에 대한 극수(棘手)로 작주(雀珠)를 봉합(封合)하며, 어찌 오르내리는 혼령(魂靈)들을 달래겠습니까? 사마(駟馬)로 벽의 틈을 지나듯이 세월은 흘러 지나가 버리니 겨우 상담(祥禫)의 제례(制禮)를 마치고 부제(祔祭)에 이르는 번잡한 예식(禮式)을 재거(載擧)함에 칠세(七世)를 가히 볼 수 있고 중호(中壼)의 아름다운 규범을 잊을 수 없습니다. 사자(四字)를 추천(追闡)함에 만약 태호(太號)가 윗대를 쫓으면 이는 역대의 아름다운 규례(規禮)입니다. 삼가하고 공경하는 재덕(齋敬)함이 덕을 간직하는 기틀이 되고 유열(維烈)함은 겨룰 바가 없으며 휘유(徽柔)함이 승건(承乾)하는 상(象)으로 목(穆)에 임(臨)하시었습니다. 삼가 사신을 파견하여 책보(冊寶)를 받들고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여 ‘제휘 열목(齊徽烈穆)’이라 하였습니다. 태어나면서 검소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조용하고 은밀하여 정성이 한결같으니 보첩(寶牒)에 향내가 가득하여 홍호(鴻號)는 계속하여 앞을 빛내니 연이은 경사가 요도(瑤圖)에 가득하고 준명(駿命)을 맞아 훗날까지 늘어질 것입니다.”하였다. 이재완(李載完)이 짓다.
3월 21일 이재극(李載克)이 아뢰기를, “이번 부묘(祔廟) 때 장조 의황제(莊祖 懿皇帝)를 조천(祧遷)하는 의절(儀節)을 전례(前例)를 살펴서 행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례의(五禮儀)를 삼가 살피니 부묘 1일 전에 고제(告祭)한 뒤 조천을 봉행하도록 되어 있는데, 영묘조(英廟朝) 정축년(1757)에는 대신에게 문의하여 대명회전(大明會典)에 따라 합향(合享) 후에 조천하는 것으로 하고 수교(受敎)를 지어 보편(補編)에 수록하였습니다. 헌종조(憲宗朝) 정유년(1837) 경종대왕(景宗大王) 조천 때와 철종조(哲宗朝) 신해년(1851) 진종대왕(眞宗大王) 조천 때에는 보편의 내용을 삼가 준행하는 것으로 품정(稟定)하여 행하였습니다. 이번에 또한 이것에 근거하여 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순종 융희제가 명하기를, “이대로 행하라.”하였다.3월 22일 선원전(璿源殿)을 창덕궁(昌德宮) 후원(後苑) 북일영(北一營) 터에 새로 짓고 태조(太祖) 옛 선원전(璿源殿) 봉안본(奉安本), 세조(世祖), 원종(元宗) 옛 영희전(永禧殿) 봉안본, 숙종(肅宗),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 문조(文祖), 헌종(憲宗) 옛 선원전(璿源殿) 봉안본, 철종(哲宗) 옛 문한전(文漢殿) 봉안본, 고조 광무제 중화전(中和殿) 봉안본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고, 이어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3월 29일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예고제(豫告祭)를 행하였다. 3월 30일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고동가제(告動駕祭)를 행하였다. 경효전(景孝殿)의 고동가제를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고조 광무제의 신주(神主)를 신련(神輦)에 봉안하고 태묘(太廟)로 나아갔는데 돈화문(敦化門) 안에 이르러 지송(祗送)하였다.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신주를 태묘(太廟)로 받들고 나아갔다. 3월 31일 태묘(太廟)에 나아가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피는 성생례, 성기례를 행하였다. 고조 광무제를 태묘(太廟)의 18실에 부묘(祔廟)하였다. 명성황후(明成皇后)도 같이 부묘(祔廟)하였으며, 이어 부묘대제(祔廟大祭)를 행하였다. 장조 의황제(莊祖 懿皇帝)의 신주를 영녕전(永寧殿)으로 조천(祧遷)하였다. 이어 안신제(安神祭)를 행하였다. 5월 4일 건원릉(建元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수릉(綏陵)에 나아가 친제(親祭)를 행하였다. 이어 경릉(景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양 귀인(梁 貴人)이 낳은 복녕당 아기(福寧堂 阿只)에게 덕혜(德惠)라는 호를 하사하였다.12월 28일 고조 광무제의 어장의병부묘의궤(御葬儀竝祔廟儀軌)를 편찬한 모든 인원들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1922년 10월 5일 창덕궁 상림원에서 밤을 줍는 습율회(拾栗會)를 행하고, 이어 오찬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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