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 1928년 순종 융희제 순정황후
등록일: 2013-08-16 14:58:18 , 등록자: 김민수 
1923년 - 1928년 순종 융희제 순정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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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3월 20일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갔다. 순정황후도 함께 임어(臨御)하여 아악 무동(雅樂 舞童)의 정재(呈才)를 관람하였다.3월 26일 전 주사(主事) 지운영(池雲英)이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해 노선도(老仙圖) 1본(本)을 헌상(獻上)하였다. 일금 50원을 하사하였다. 3월 30일 전주 이씨(全州 李氏) 대동 종약소(大同宗約所)에 일금 300원을 하사하였다. 올 해 1월부터 매 삭(朔)에 지급하였다.5월 21일 옥돌장(玉突場)에 나아가 당구 선수(撞毬 選手) 모리자키 쿠라지로의 당구(撞毬)를 관람하였다.6월 2일 건원릉(建元陵), 수릉(綏陵), 경릉(景陵)에 나아가 친제(親祭)하고 돌아와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6월 20일 친잠실(親蠶室)에 나아갔다. 순정황후도 함께 나아가 수견식(收繭式)을 행하였다. 그리고 주합루(宙合樓)로 나아가 다과(茶菓)를 베풀었다. 10월 2일 관동(關東) 지방 진재(震災)의 상병자(傷病者) 구호를 위해 붕대용(繃帶用) 목면(木棉) 60반(反)을 하사하였다.10월 29일 홍릉(洪陵)에 나아가 친제(親祭)하고 돌아와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11월 28일 의효전(懿孝殿)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순명황후(純明皇后) 탄신일이었다.11월 29일 의친왕 이강(李堈)에게 고양군(高陽郡) 화양(華陽) 모진 2리(毛陳二里)에 있는 임야(林野) 1만 4,021평(坪)을 하사하였다. 그의 사친(私親) 귀인(貴人) 장씨(張氏)의 묘지(墓地)를 확장하였기 때문이다.
1924년 1월 16일 한창수(韓昌洙)를 보내 1923년 9월 일본 관동(關東) 지방 진재(震災)에 대한 문후(問候)를 전하였다.1월 18일 고조 광무제가 임금의 자리에 오른 어극(御極) 60년인 주갑(周甲)이므로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1월 24일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순정황후도 따라 나아가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홍릉(洪陵) 기신제(忌辰祭) 때문이었다. 2월 5일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고, 의효전(懿孝殿)에 나아가 전배하였다.3월 13일 친히 구(舊) 영수각(靈壽閣) 기사(耆社)의 제명첩(題名帖)에 제목을 붙이고, 친히 시(詩)를 지어 말하시기를, “내가 선덕(先德)을 쫓는데 어두웠으나 이 번에 망육(望六)을 맞이해 다행히 여러 노숙(老宿)과 함께하니 송축이 하늘에서 내리는구나.”하였다. 그리고 기로소(耆老所)의 여러 신하들에게 계속해서 정진하라고 명(命)하였다.
4월 26일 총독(總督) 사이토 마코토가 창경궁에 1913년 식재한 벚꽃나무를 즐기는 관앵회(觀櫻會)를 열었다. 5월 15일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갔다. 순정황후도 함께 나아가 모란꽃을 관상(觀賞)하고 오찬(午餐)을 베풀었다. 종척(宗戚)이 함께 식사하였다.6월 19일 주합루(宙合樓) 잠실(蠶室)에 임어(臨御)하였다. 순정황후도 함께 나아가 수견식(收繭式)을 행하였다. 종척(宗戚)이 참석하였다.8월 25일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고조 광무제 탄일이기 때문이었다. 이해창(李海昌)에게 다례(茶禮)를 섭행(攝行)하라고 명(命)하였다. 9월 17일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순정황후도 함께 나아갔다.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명성황후(明成皇后)의 기신제(忌辰祭) 때문이었다.11월 3일 태묘(太廟)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의효전(懿孝殿)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1925년 2월 24일 귀인(貴人) 혜안당(惠安堂) 양씨(梁氏)의 상례에 장례 비용으로 일금 500원을 하사하였다. 8월 12일 여흥 민씨 종약소(驪興 閔氏 宗約所)에 일금 300원을 하사하였다.8월 21일 광산 김씨 종약소(光山 金氏 宗約所)에서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문집(文集) 일부를 바쳤다. 연석(硯石) 1면을 하사하였다.10월 6일 희정당(熙政堂)에 임어(臨御)하였다. 순정황후도 함께 임어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의 기신제(忌辰祭)를 치르고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1926년 1월 1일 순종 융희제가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순정황후와 같이 나아가 종척(宗戚) 이하의 신년축하를 받았다.2월 1일 고조 광무제의 기신제(忌辰祭)이므로 현백운(玄百運)으로 하여금 홍릉(洪陵)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게 하고 이어 제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2월 4일 특별히 기사 노인(耆社老人) 전 정이품(前正二品) 김종근(金宗根)의 상(喪)에 일금 50원을 하사하였다.3월 19일 서향각(書香閣)에 모셨던 어진(御眞)을 낙선재(樂善齋)에 이봉(移奉)하였는데, 한창수(韓昌洙)에게 봉심(奉審)하라고 명하였다. 4월 11일 의친왕 이강(李堈)과 박영효(朴泳孝), 이지용(李址鎔), 윤덕영(尹德榮)·이재곤(李載崑), 이윤용(李允用) 및 여러 종척(宗戚)이 돌아가면서 문안하였다. 4월 24일 병세가 크게 위독하였다.
4월 25일 순종 융희제가 묘시(卯時)에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에서 붕어하였다. 복(服)을 바꾸었다. 순정황후는 관(冠)과 웃옷을 벗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소복과 소혜(素鞋)와 추포로 만든 버선을 신었다.4월 26일 빈전(殯殿)과 혼전(魂殿)은 선정전(宣政殿)으로 하고 초명정 서사(初銘旌 書寫) 처소(處所)는 희정당(熙政堂)으로 하였다. 민영기(閔泳綺)가 다음날 습(襲)할 때 종척(宗戚) 이하의 사람들이 들어와 참석한다고 하였다. 또 습(襲)한 후에 종척(宗戚) 이하의 사람들은 끝까지 임하여 거행(擧行)하고 이로부터 성빈(成殯) 때까지 매일 조곡(朝哭)과 포곡(晡哭)을 하고 성복(成服)한 후에 인산(因山)에 이르기 전까지 창덕궁(昌德宮) 안에 입직(入直)하는 인원(人員) 및 종척 이하 입궁(入宮)하는 사람들은 아울러 조곡(朝哭)에 들어와 참석하고 포곡(晡哭)할 때 또한 임하여 거행하기를 허락한다. 그리고 최복(衰服)을 입고 곡(哭)을 매우 구슬프게 울며 네 번의 배례(拜禮)를 행한다고 아뢰었다. 또 오례의(五禮儀)에 의하여 단지 조석(朝夕)으로 상식(上食)을 올리며 전에는 국휼(國恤)이 있을 때와 같이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던 전례(前例)에 의하여 거행한다고 아뢰었다.
4월 27일 미시(未時)에 목욕(沐浴)과 습(襲)을 하고 전(奠)을 드렸으며 신시(申時)에는 소렴(小斂)을 하고 전(奠)을 드렸다. 모두 의례(儀禮)와 같이 하였다.소렴 의대(小斂 衣襨)는 가슴과 등에 용(龍)을 수놓은 원령(圓領)있는 황포(黃袍) 하나, 반견의(半臂衣)인 저사 답호(紵絲 褡호) 하나, 철릭 하나, 다음은 나원령(羅圓領) 하나, 답호(褡호) 하나, 철릭 하나 포습(鋪襲)이다., 다음은 홍저사 원령(紅紵絲 圓領) 하나, 답호 하나, 백초고(白綃袴) 둘이다. 장생전(長生殿)의 재궁(梓宮)은 수망진자재궁(首望珍字梓宮) 내장(內長) 6척, 외장(外長) 6척 6촌, 내광(內廣)이 1척 5촌 5분, 외광(外廣)이 2척 1촌 5분, 내고(內高)가 1척 5촌 5분, 외고(外高)가 2척 1촌 5분이다. 으로 하였다. 초명정 서사원(初銘旌 書寫員)에 윤택영(尹澤榮)을 개명정 서사원(改銘旌 書寫員)에 윤용구(尹用求)을 하현궁 명정 서사원(下玄宮 銘旌 書寫員)에 민병석(閔丙奭)을 임명하였다.
4월 28일 미시(未時)에 재궁(梓宮)을 받들어 인정전(仁政殿) 동행각(東行閣)에 임시로 안치하였다. 4월 29일 미시(未時)에 선정전(宣政殿)에 영상(靈床)을 이봉(移奉)하였다. 신시(申時)에 대렴(大斂)과 하재궁(下梓宮)을 행하고 전(奠)을 시행하였는데, 의례(儀禮)와 같이 하였다. 술시(戌時)에 성빈(成殯)하였다. 민영기(閔泳綺)가 시호(諡號)를 정할 날짜를 의논했는데, 5월 1일이 길(吉)하다고 해서 이날 행하기로 정하였다. 종척(宗戚)이 회의에 참여했고 묘호(廟號), 전호(殿號)도 같은 날에 의논하게 한다고 하였다. 총호원(總護員)에 윤택영(尹澤榮)을, 행장 제술원(行狀 製述員)에 윤덕영(尹德榮)을, 시책문 제술원(諡冊文 製述員)에 이재곤(李載崑)을, 서사원(書寫員)에 이우면(李愚冕)을, 애책문 제술원(哀冊文 製述員)에 민영휘(閔泳徽)를, 서사원에 민영찬(閔泳瓚)을, 지문 제술원(誌文 製述員)에 윤용구(尹用求)를, 서사원에 민병석(閔丙奭)을, 표석 음기 제술원(表石 陰記 製述員) 및 서사원에 박영효(朴泳孝)를, 대자 전문(大字 篆文) 및 시보 전문 서사원(諡寶 篆文 書寫員)에 박영효(朴泳孝)를 임명하였다.총호원(總護員)이 재궁(梓宮)에 은정(銀釘) 위의 가칠(加漆)을 이달 30일에 시작하여 하루간격으로 10번 칠할 것에 준하여 하기로 하였다.
5월 1일 미시(未時)에 성복(成服)하였다.총호원(總護員) 윤택영(尹澤榮)이 산릉주감 제거(山陵主監 提擧) 홍순형(洪淳馨)·김종한(金宗漢), 민영기(閔泳綺) 등과 함께 상지원(相地員) 등을 거느리고 홍릉(洪陵) 국내(局內)에 달려나가 간심(看審)하고 들어와 산론별단(山論別單)을 수정하여 들인다고 다시 간심한 후에 이어 봉표(封標)를 세우고 이번 장례(葬禮)를 지내는 것은 이미 홍릉 국내로 정했으므로 유릉(裕陵)을 먼저 옮기고 부의(祔儀)를 편하게 하는 것이 정례(情禮)에 합당하다. 즉시 택일(擇日)하여 거행(擧行)하게 하고 유릉을 옮길 때는 장례에 임하는 총호원 이하 세 주감(主監) 들이 겸관(兼管)하여 거행하고 천봉(遷奉) 봉표는 신봉(新封)을 다시 간심한 후에 봉표할 때 동시에 거행하게 하고 동혈 삼분제(同穴三墳制)로서 재정(裁定)하기로 하였다.민영기(閔泳綺)가 묘호(廟號)의 망단자(望單子)는 순종(純宗), 경종(敬宗), 성종(誠宗)으로 하였는데 수망(首望)대로 하며, 시호(諡號)의 망단자는 문온(文溫), 무녕(武寧), 돈인(敦仁), 성경(誠敬)이며 존호(尊號)의 망단자는 효(孝)인데 모두 아뢴대로 하였다. 전호(殿號)의 망단자는 효령(孝寧), 효성(孝成), 효정(孝靖)인데, 수망대로 하였다.이윤용(李允用)을 어장(御葬)할 때 배종 감독(陪從 監督)으로 차하(差下)하였다. 지석(誌石)은 각년(各年)의 예에 의하여 오석(烏石)으로 하고 정헌집(正軒集), 삼경사서(三經四書), 문헌비고(文獻備考), 완염통고(琓琰通考) 퇴광(退壙)에 봉안(奉安)하기로 하였다.
5월 3일 김승규(金昇圭)를 빈전 관리(殯殿 管理)에 임용하였다. 5월 5일 총호원(總護員) 윤택영(尹澤榮)이 산릉주감 제거(山陵主監 提擧)가 상지원(相地員) 등을 같이 거느리고 금일(今日) 홍릉(洪陵) 국내(局內)에 나가 충분히 의논하고 확실히 정한 후에 홍릉 왼쪽 언덕에 당일(當日) 오전 11시 묘방(卯方)으로 앉아 유방(酉方)으로 향하는 곳에 정혈(正穴)을 재정(裁定)하였으며, 곧 예에 의해 봉표(封標)를 세우고 이어 길을 돌아왔다. 민영기(閔泳綺)가 오늘 인산(因山) 및 천릉(遷陵)할 때에 각 항의 길일(吉日)을 회의하여 택일하였는데, 유릉(裕陵)에 풀을 베고 흙을 파헤치는 일을 처음 시작할 날을 5월 7일 오후 2시로 하고, 개금정(開金井)은 5월 18일 오전 10시로 하고, 발인(發靷)은 6월 10일 오전 8시로, 폐하의 하현궁(下玄宮)은 6월 11일 오후 10시로, 천릉하였다고 구릉(舊陵)에 계(啓)를 올리는 것은 5월 21일 오전 8시로, 발인은 6월 4일 오전 6시로, 하현궁은 6월 5일 오전 6시로 한다고 입계(入啓)하였다.
5월 6일 민영기(閔泳綺)가 우주 서사원(虞主 書寫員)에 민병승(閔丙承)을 차출하였다.5월 9일 총호원(總護員) 윤택영(尹澤榮)이 침전(寢殿)을 당연히 새로 건립해야 하고 유릉(裕陵)을 옮기는 것이 이미 순종 융희제 폐하의 인산(因山) 전(前)이므로 순명황후(純明皇后) 신어상(神御床)을 봉안(奉安)할 가침전(假寢殿)도 또한 당연히 새로 건립해야 하는데 그러나 일자(日字)가 급박하고 공사(工事)가 커서 기한까지 준공되기 어려우므로 우선 홍릉(洪陵)을 천봉(遷奉)할 때의 예에 따라 가침전(假寢殿) 안에 판벽(板壁)을 사이로 순명황후 신어상을 전(殿)의 동쪽에 봉안하고 순종 융희제 폐하의 재궁(梓宮)은 전의 서쪽에 봉안하여 분설(分設)하여 거행하게 하는 것이 임시로 편의(便宜)에 합당하다고 하였다.5월 10일 윤용구(尹用求)를 산릉주감 제거(山陵主監 提擧)에서 해임하고 민병한(閔丙漢)을 산릉주감 제거로, 정만조(鄭萬朝)를 빈전주감 제거(殯殿主監 提擧)로 임명하였다.민영기(閔泳綺)가 천봉(遷奉)할 때 광중 명정 서사원(壙中 銘旌 書寫員)에, 민영휘(閔泳徽)를, 행로 명정 서사원(行路 銘旌 書寫員)에 윤택영(尹澤榮)을, 재궁 상자 서사원(梓宮 上字 書寫員)에 민영휘를, 계찬궁원(啓欑宮員)에 이지용(李址鎔)을, 지문 추기 제술원(誌文 追記 製述員)에 민영휘를, 서사원(書寫員)에 민영린(閔泳璘)을 계청(啓請)하여 차출(差出)하였다.
5월 13일 민영기(閔泳綺)가 태묘(太廟)에 시호(諡號)를 청하고, 빈전(殯殿)에 시호(諡號)를 올릴 때의 독책원(讀冊員)에 정은조(鄭誾朝)를, 견전(遣奠)할 때에 독애책원(讀哀冊員)에 이순하(李舜夏)를 계청(啓請)하여 차출(差出)하였다.5월 17일 서상훈(徐相勛)을 어장주감 제거(御葬主監 提擧)로, 남규희(南奎熙)를 산릉 주감 제거(山陵主監 提擧)로 임명하였다.5월 18일 민영기(閔泳綺)가 천봉 발인(遷奉 發靷)할 때 예당(禮堂)에 남작(男爵) 박기양(朴箕陽)을, 병당(兵堂)에 윤철규(尹喆圭)를, 공당(工堂)에 한진창(韓鎭昌)을, 돈체원(頓遞員)에 엄준원(嚴俊源)을 계청(啓請)하여 차출(差出)하였다.5월 19일 천봉(遷奉)하여 현궁(玄宮)을 낼 때 및 발인(發靷)하여 하현궁(下玄宮)을 내릴 때 솔여재궁원(帥舁梓宮員)에 민영기(閔泳綺)를, 식재궁원(拭梓宮員)에 민영휘(閔泳徽)를, 증옥백원(贈玉帛員) 및 복토원(覆土員)에 윤택영(尹澤榮)을 임명하였다.5월 26일 유릉(裕陵) 순명황후(純明皇后)의 재궁(梓宮)을 봉출(奉出)하여 침전(寢殿) 찬궁(欑宮) 안에 이봉(移奉)하고 성빈(成殯)했으며 이에 영좌(靈座)를 설치하여 별전(別奠)을 행하였다. 태묘(太廟)에 시호(諡號)를 청하고 빈전(殯殿)에 시호(諡號)를 올릴 때 청시(請諡) 및 상시원(上諡員)에 윤택영(尹澤榮)을 임명하였다.5월 27일 재궁(梓宮)을 결과(結裹)하고 이어 별전(別奠)을 행하였다.5월 29일 발인(發靷) 및 하현궁(下玄宮)할 때 솔여재궁원(率舁梓宮員)에 민영기(閔泳綺)를, 식재궁원(拭梓宮員)에 박영효(朴泳孝)를, 복토원(覆土員)에 윤택영(尹澤榮)을 임명하였다.
5월 31일 시책보(諡冊寶)를 빈전(殯殿)에 올렸고 명정(銘旌)을 고친 후 별전(別奠)을 행하였다. 유릉(裕陵) 빈전(殯殿)에 친히 향(香)을 올렸고 민병석(閔丙奭)을 보내어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친히 제문(祭文)을 지었는데, “오호라. 슬프도다. 우리 황형(皇兄)이 춘저(春邸)에서 덕을 기르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임금의 금슬(琴瑟)이 좋은 덕이 자연히 아랫사람에게 미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성스럽고 성스러워 짝하여 본받음이었습니다. 우리 돌아가신 아버님을 섬기기를 23년이었습니다. 황형(皇兄)이 효에 돈독하였으며 황후의 내조(內助)가 서로 맞았습니다. 규중(閨中)에 범절(凡節)이 갖추어져서 육궁(六宮)이 칭송하였습니다. 중년(中年)에는 그윽하게 빛났으나 하늘이 나라의 자리를 내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위호(位號)는 두루 융성해졌습니다. 덕을 사모함이 새로운 것 같았으며 원(苑)에 의전(懿殿)을 깊게 했습니다. 해마다 때에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어찌 흉화(凶禍)를 생각했겠습니까? 갑자기 하늘의 무너짐을 맞이했습니다. 점을 쳤는데 새로운 길조(吉兆)가 있었습니다. 선릉(先陵)을 배호(陪護)하고 후장(后藏)에 우러러 생각했습니다.20년이 지나고 종래부터 풍수는 송사(訟事)를 모아 습한 것에 빛을 내리쬐고 물이 흐르고 씹는 것을 같이 했습니다. 예는 당연히 옮겨 합부(合祔)해야 했습니다. 현화(玄和)가 다시 임하여 장차 길을 이끌 것을 아뢰었습니다. 신과 사람의 이치가 함께하여 오직 아주 편안함을 헤아렸습니다. 여러 감정이 서러움을 뒤쫓았고 상여(喪輿)를 잡아당겨 한 곳으로 모았습니다. 두려워서 옛 일을 어루만지며 오늘을 슬퍼합니다. 향을 베푸는 전(奠)을 마련하고 드리움을 바라며 흠향(歆饗)합니다. 오호라. 슬프도다.”하였다.
6월 2일 빈전(殯殿)에 친히 향(香)을 올리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오호라. 슬프도다. 우리 황형(皇兄)이여. 도(道)가 온전하고 덕(德)이 갖추어졌으며 선행(善行)이 한없이 많았습니다. 하나같이 효(孝)라는 글자에서 근원하였습니다. 하늘을 성(誠)으로써 근본 하였으며 거짓과 허위가 없었습니다. 30년 동안 대궐에 있으면서 침전(寢殿)에 문안드리고 음식을 살폈습니다. 옆에서 반걸음도 떨어져 있지 않았으며 조금도 뜻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내선(內禪)에 처하여 승인하면서 슬퍼했으며 떨며 두근거려 했습니다. 그 때의 모양이 위태로웠고 천하(天下)에 많은 일이 있었으므로 의(義)가 급하게 괴란(壞亂)을 잡아야했습니다. 마음에 어찌 지위를 탐하였겠습니까? 몸이 스스로 있지 못했으며 노력을 해도 감히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4궁(四宮)에게 장수하기를 칭하고 만 가지 수레로 지극함을 봉양했습니다. 소의 간식(宵衣旰食)하기를 서로 얽혔으며 어지러움을 다스리고 다시 다스렸습니다. 우리 억조(億兆) 백성(百姓)을 생각하여 우리 온갖 관리를 바로잡아 경장(更張)하여 일신(一新)하였으며 자못 깊이 든 잠을 깨운 것과 같았습니다. 추운 겨울에 여러 지방을 살폈는데 남쪽으로 거슬러 가서 미침에 이르렀습니다. 일찍이 수레를 타고 나가 친히 밭을 갈았으며, 부리고 밀어주어 자신을 친하게 했습니다. 삼묘(三廟)를 추융(追隆)하여, 예(禮)가 의(義)로 인하여 일어났습니다. 양조(兩朝)의 보감(寶鑑)을 만들었는데, 나라의 전례(典禮)가 환하게 광채가 났습니다. 옛날에도 어찌 황급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오늘에야 실로 의를 따랐습니다. 고조 광무제는 아무 근심이 없이 말하기를, ‘훌륭한 황태자가 순임금이 요임금을 돕는 것처럼 하니, 화평한 세상이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실로 믿기 어렵도다. 운이 기울어지고 일이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즉위하시어 무위(無爲)로 다스리시니 구중(九重) 궁궐이 엄숙해졌습니다.
사랑하고 사모하는 일념(一念)이 잠시라도 떨어지지 않아서 조를 심은 뜰에서 익은 조를 거두었고, 맛있는 음식이 있는 주방에 고깃점을 나누고, 직접 봉하여 붙여 조석으로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무랍(戊臘)에는 구휼하는 것을 성실하게 하였습니다. 나라의 예를 질서있게 하고, 반드시 전궤(奠饋)를 친히 행하였습니다. 궁전의 뜰에 꽃이 무성하자, 휘장을 설치하여 피하게 했으며, 능에 있는 풀이 가을 이슬에 젖으면 수레를 타고 달려갔습니다. 선조의 제사를 엄숙하게 지내서 희생과 술과 밥을 정결하게 지내니 역사에 밝게 빛나서 백왕(百王)에게 부끄러울 바가 없었습니다. 오호라. 슬프도다. 어린 나이에 배우기 위해 외국으로 유학을 가서 오래 모시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돈독한 우애를 보여주셨으며 늘 염려하였습니다. 만년에는 반드시 기쁘게 해 드릴 수 있기를 기원했는데 오늘날에 다시 일이 어긋나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의약의 보람도 없이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으니 우리 유민(遺民)은 누구를 믿고 의지합니까? 여항(閭巷)에서 밤새 곡(哭)하는 소리에서 가히 임금의 혜택이 저들에게 미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호라. 슬프도다. 우거진 금곡(金谷)의 숲에는 구름만이 몰려 있습니다. 평생 받드는 것이 진실로 효사(孝思)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감히 다스리라는 명령을 잊겠습니까? 그래서 분분한 의논을 일치시켜 우선 유릉(裕陵)으로 옮기고 태묘에 부묘하여 만세(萬世)에 덕을 드러내며 은혜를 높이고 시호(諡號)를 올렸습니다. 일을 조심스럽게 거행하고 법도를 따라 어기지 않았으니 보답을 도모하는 것이 이에서 머뭅니다. 슬픔이 하늘에 미쳐서 오래도록 길할 것입니다. 중하(仲夏) 초 2일. 하늘에 점점이 구름만 있으니 만사(萬事)가 버려지는 것 같습니다. 바람이 붉은 깃발을 움직이니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립니다. 감히 연이어 술을 따르니 무릇 흠향(欽饗)하소서. 오호라. 슬프도다.”하였다.
6월 3일 신시(申時)에 유릉(裕陵)에서 찬궁(欑宮)을 열고 별전(別奠)을 행하였다. 김승규(金昇圭)를 빈전주감 제거(殯殿主監 提擧)에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6월 4일 묘시(卯時)에 견전(遣奠)을 행하였다.진시(辰時)에 순명황후(純明皇后) 영여(靈轝)가 금곡(金谷) 산릉(山陵)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6월 5일 묘시(卯時)에 하현궁(下玄宮)을 행하였다. 진시(辰時)에 첫 번째 우제(虞祭)를 행하였다. 6월 9일 인시(寅時)에 계빈(啓殯)을 행하였다. 신시(申時)에 조전(祖奠)을 행하였다. 6월 10일 묘시(卯時)에 견전(遣奠)을 행하였다. 영여(靈轝)가 금곡(金谷)을 향하여 떠났다. 훈련원(訓練院) 광장(廣場)에서 봉결식(奉訣式)을 행하였다. 종척(宗戚) 및 친임관(親任官) 이하가 모두 진향(進香)하였다.6월 11일 해시(亥時)에 하현궁(下玄宮)을 행하였다. 입주전(立主奠) 및 초우제(初虞祭)를 행하였다.1928년 5월 3일 순명황후(純明皇后)의 휘호망(徽號望)으로 ‘경현(敬顯)’으로 하기로 의논해서 정하였다. 7월 6일 태묘(太廟)에 순종(純宗) 융희제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순명황후(純明皇后)의 신주도 함께 모셨으며, 어진(御眞)을 선원전(璿源殿)에 봉안(奉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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