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뉴스 | 의회소식 | 정계소식 | 사회/인물 | 문화/교육 | 특집/기획 | 칼럼/사설 | 시론/평론 | 포토패러디만평 | 자유게시판
[ 2025년 06월 21일 토요일 ]  


알리는 말씀
심층토론방
자유게시판
기사제보
특별초대석
단체소식
우리동네소식
단체소개
관련사이트






백두산(白頭山) 분수령(分水嶺)의 경계를 정한 백두산정계석(白頭山定界石)

등록일: 2013-07-06 12:22:07 , 등록자: 김민수

백두산(白頭山) 분수령(分水嶺)의 경계를 정한 백두산정계석(白頭山定界石)



http://blog.naver.com/msk7613



백두산정계석(白頭山定界石)은 조선국과 청나라가 백두산(白頭山) 분수령(分水嶺)의 경계를 정한 정계석(定界石)이며 청나라 황제가 1712년(숙종 38년) 목극등(穆克登)을 조선(朝鮮)에 보내 백두산(白頭山) 분수령(分水嶺)의 경계를 분명히 정하는 백두산정계석(白頭山定界石)을 세우라고 칙명(勅命)을 내리자 조선국은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 군관 이의복(李義復)에 명해 이를 따르도록 했다. 백두산정계석의 명문에는 조선 측의 박권 이름이 보이지 않는데 박권은 고령이므로 백두산(白頭山)에 오르지 않고 군관과 역관만 딸려 보내 정계석을 세우게 됐다. 백두산정계석(白頭山定界石) 명문의 내용은 ‘청(淸) 길림의 오라 총관(烏喇 摠管) 목극등은 청(淸)과 조선(朝鮮)의 경계를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鴨綠江)이요, 동쪽은 토문강(土們江)이므로 분수령에 돌을 새겨 기록하노라. 강희 51년 5월 15일, 사자관인 필첩식(筆貼式) 소이창, 통관(通官) 이가 및 조선 군관(朝鮮 軍官) 이의복, 조태상. 차사관(差使官) 허량, 박도상. 통관(通官) 김응헌, 김경문‘ 이다.


간도(間島)는 1677년 이후 조선(朝鮮)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금봉지(禁封地)로 정하여 청(淸)나라 사람은 거주가 금지되었다. 청(淸)나라는 1880년 토문(土門)이 두만(豆萬)을 뜻한다고 주장하였고 1881년 길림의 장군 명안(明安)과 청(淸)나라 황제가 특정한 중요 사건을 처리하기 위한 흠차대신(欽差大臣) 오대장을 보내어 간도(間島) 침략에 착수하고 조선국은 1883년에 서북경략사 어윤중·김윤식을 보내어 백두산(白頭山) 분수령(分水嶺)의 경계를 정한 백두산정계석(白頭山定界石)을 조사하게 하고, 간도(間島)에 대한 중국의 침탈에 항의했다. 1885년,1887년 이중하(李重夏)를 토문감계사(土們勘界使)로 파견하여 감계회담(勘界會談)을 통해 청(淸)과 국경문제를 놓고 백두산정계석(白頭山定界石)의 토문(土門)에 대해 규명하고자 시도했으나 결렬되었다.1903년(광무 7년) 대한제국은 간도(間島)를 함경도로 편입하는 동시에 간도관리사 이범윤(李範允)을 간도(間島)에 파견하여 치안 유지 및 대한제국인 보호에 힘썼다. 을사늑약 불법 늑결로 대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제국주의는 1909년 9월 4일 불법적으로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고 대한국령 간도(間島)의 영유권을 청(淸)에 불법 양도하였다.

1494년 9월 24일 성종이 영안도 관찰사(永安道 觀察使) 이계남(李季男)·남도 절도사(南道 節度使) 박암(朴巖)·북도 절도사(北道 節度使) 원중거(元仲秬)에게 유시하기를, “건주위(建州衛) 야인(野人) 심반거(沈半車) 등이 평안도(平安道) 만포진(滿浦鎭)에 이르러 고하기를, ‘전일에 전사(戰死)한 사람의 족당(族黨)이 원한을 머금고 매양 보복(報復)하려고 서로 약속하여 무리를 모아서 아침저녁으로 침입하려고 하나, 강 아래는 방비가 있어 침범할 수 없고, 백두산(白頭山) 근처는 허술함을 틈타 노략질을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비록 믿을 수는 없더라도 내게 있어서는 방비가 없을 수 없으니, 모름지기 방어(防禦)를 엄중히 하여서 뜻밖의 사변(事變)을 경계하라.”하였다.1624년 9월 28일 함경 감사 이창정(李昌庭)이 인조에게 치계하기를, “신이 순행차 삼수(三水)에 도착하여 관방(關防)의 형세를 살펴보건대, 백두(白頭)·장백(長白) 두 산이 모두 눈에 들어왔습니다. 부로(父老)에서 물어보니 ‘백두산은 우리 지경에서 거리가 겨우 4∼5일정(日程)이고 장백산은 더욱 가깝다. 예전에는 호인(胡人)들의 마을로 고미평(古未坪)과 한민평(韓民坪)이 있었는데 무오년부터 모두 노추(老酋)가 데리고 돌아갔으므로, 지금은 두 산의 남쪽에 거주하는 북방 오랑캐인 호인(胡人)이 없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1679년 12월 12일 북병사(北兵使) 류비연(柳斐然)이 처음에 청(淸)나라의 차사원(差使員)이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 두 산의 형세를 물어올 적에 지도(地圖)와 나침판을 내놓은 일을 계문(啓聞)하여 왔었는데, 이 때에 와서 또 숙종에게 치계(馳啓)하기를, “이른바 지도는 차사원에게 다시 물어본즉 부령 부사(富寧府使) 최양필(崔良弼)은 ‘도첩(圖帖)은 곧 우리 나라의 한 폭의 장지(壯紙)로서, 대개 평안도 청천강(淸川江) 북쪽 여러 고을과 북관(北關)의 행영(行營)과 육진(六鎭), 그리고 삼수(三水)·갑산(甲山)에서 영흥부(永興府) 경계 끝까지의 모든 고을과 산천이 완연히 그려져 있고, 저쪽의 오국성(五國城)·여진(女眞)·걸가퇴(걸加退)·문암(門巖) 등지도 또한 그 속에 그려져 있다.’고 하고, 대통관(大通官) 장효례(張孝禮)에게 물어본즉, ‘외국의 지형을 어떻게 자세히 알겠소.’ 하기에 ‘천하의 지도를 등사해 가져 왔다는 말이 있다.’ 하였습니다. 저들이 우리나라의 산천과 도로의 원근(遠近)을 알고 싶어서 이 지도를 만든 것인지, 아니면 헛말을 지어내서 우리로 하여금 의혹을 갖게 하자는 것인지, 그 진상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오라지(五羅地)에 원수(元帥)를 두어 나무를 베어 길을 열고 백두산에 치제(致祭)를 하였다는 등의 말로 은근히 과장하고, 또 저들과 우리의 국경 지도로써 기관(機關)을 정탐해 보려는 듯이 하며, 더러는 경원(慶源)에 시장을 열 적에 건너편의 선성(善城)·풍성(豊城)·걸가퇴(加退) 등지를 가볼 것인데, 돌아올 때에는 백두산의 터놓은 길로 올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문암(門巖)이란 종성(鍾城)에서 40리의 거리이고, 여기에서 풍계(豊溪)·걸가퇴를 지나 1백 10여 리에 갈림길이 있는데, 북쪽은 영고탑(寧固塔)으로 가는 길이고 서쪽은 심양(潯陽)으로 가는 길입니다. 저들이 왕래하여 익숙한 길이라면 따로 다시 살필 리 없는데, 이런 말을 발설하는 것이 또한 이상한 듯합니다. 행여 지금 형세가 이미 외롭고 약해져서 덫을 놓아 세력이 강성한 것을 보이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소통사(小通事)가 청나라 사람이 사사로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항시 말하기를, ‘장백산(長白山) 밑에는 왕년에 번호(藩胡)가 철거해 간 옛길이 있다.’ 한다니, 이것을 꼭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장효례가 회령 부사(會寧府使) 김흥운(金興運)과 더불어 이야기할 적에 내년에 나오므로 머지않아 다시 만난다고 하기에 재삼 물으니, 비로소 ‘황제가 반드시 나로 하여금 백두산을 살펴보게 할 것인데, 그 때는 의주(義州)의 강가에서 길을 떠나 이곳에 올 것이다.’고 하였다 합니다. 장효례는 들뜨고 잡된 사람이어서 그대로 믿을 수는 없으나, 일이 범상하지 않습니다.”하였다.

1712년 2월 26일 청나라 차사(差使) 오라 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 등이 장차 백두산을 심사(審査)하려 하여 의주(義州)로 나오니,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칙사(勅使)의 노문(路文)인 패문(牌文)을 올려보냈다. 숙종이 하교하기를, “자문(咨文)이 들어온 뒤에 묘당(廟堂)에서 곧 품정(稟定)할 줄로 알았는데, 이제 이미 사흘인 데도 아직 품정함이 없으니 매우 답답하다. 패문이 또 이르고 날짜가 또 급하니, 명일(明日)에 품정(稟定)할 일로 분부하라.”하였다.3월 8일 약방(藥房)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사관(査官)의 행차(行次)는 정계(定界) 때문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백두산은 갑산(甲山)으로부터 거리가 6, 7일 정(程)이며 인적(人跡)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진(鎭)·보(堡)의 파수(把守)가 모두 산의 남쪽 5, 6일 정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토문강(土門江)과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한다면 물의 남쪽은 모두 마땅히 우리 땅이 되어야 하니, 마땅히 접반사(接伴使)로 하여금 이로써 변명(辨明)하여 다투게 하여야 합니다.”하니, 숙종이 허락하였다.

5월 23일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이 치계하기를, “총관(摠管)이 백산(白山)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鴨綠江)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境界)로 삼았으며,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 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분수령(分水嶺)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며 말하기를, ‘백두산(白頭山) 분수령(分水嶺)의 경계를 정한 백두산정계석(白頭山定界石)을 세우는 정계입석(定界立石)이 황상(皇上)의 뜻이다. 도신(道臣)과 빈신(貧臣)도 또한 마땅히 정계석 끝에다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하기에 신 등은 이미 함께 가서 간심(看審)하지 못하고 정계석 끝에다 이름을 새김은 일이 성실(誠實)하지 못하다.’는 말로 대답하였습니다.”하였다.

본 게시물에 대한 독자 의견

포토패러디만평: 共存의 生存 ...
구정뉴스: 광진구,‘2025 ...
구정뉴스: 인사>광진 ...
구정뉴스: 광진 재창조 ...
의회소식: 광진구의회,‘ ...
사회/인물: 심층! 화양전 ...
의회소식: 광진구의회, ...
구정뉴스: 30년 광진구 ...
구정뉴스: 2025광진환경 ...
사회/인물: 심층>구의 ...
구정뉴스: 광진구, 2025 ...
구정뉴스: 단독>KBS ...
구정뉴스: 노룬산골목시 ...




사회/인물: 심층>구의 ...
구정뉴스: ‘KBS 전국노 ...
구정뉴스: 광진구, 6.7. ...
구정뉴스: 광진구, 청년 ...
구정뉴스: 광진구, 지반 ...
구정뉴스: 2025광진환경 ...
사회/인물: 심층! 화양전 ...
구정뉴스: 30년 광진구 ...
의회소식: 광진구의회, ...
구정뉴스: 노룬산골목시 ...
정계소식: 제21대 대통 ...
구정뉴스: 단독>KBS ...
구정뉴스: 광진구, 2025 ...
구정뉴스: 광진재창조원 ...
정계소식: 속보>말도 ...

광진의 소리 | 이용약관 | 개인정보보호정책 | 사이버백화점 | 기사제보 | 취재의뢰 | 광고신청 | 우리동네소식 | 업체등록
e광진의소리 | 인터넷신문사업등록 : 서울특별시 아01391 | 사업자등록번호 : 634-55-00292 등록일자 2018년10월08일
발행인 겸 편집인 : 유윤석 | 편집국장 : 유윤석 청소년지도담당:윤태한 광고 및 기사제보 : 010-4858-0954
주소 : 서울시 광진구 뚝섬로30길 21-7.104호 | 대표전화 : (02) 444-2622